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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급)/전근대

통일신라 시대 스토리텔링 간단 요점 정리

by ♾⚕⨊⪒૱ 2021.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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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국가 중에서 마지막으로 전성기를 누리고 통일을 완성했던 통일신라에 대해 배워 보겠습니다. 신라로 치면 중대와 하대 시기라고 할 수 있고, 통일신라로만 보면 전기와 후기시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전기에는 왕권으로 꽉 잡아갔지만 후기에는 무너지면서 멸망으로 이어졌습니다.

 

 

 

 

  1. 통일신라
    1. 전기 통일신라, 중대 신라 시대
      1. 태조 무열왕(김춘추)
      2. 문무왕
      3. 신문왕
    2. 후기 통일신라, 하대 신라 시대
      1. 왕권의 추락
      2. 1세대 호족
      3. 2세대 호족
    3. 고려의 건국과 의의
      1. 중세시대의 의의

 

통일신라

석굴암-불상
신라 석굴암 보존불

통일신라는 통일 문무왕 때 통일을 완성 시킨 이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번영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혜공왕이 피살된 후로부터 이상 해지기 시작합니다. 왕권의 힘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지방에서 커지는 호족 세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고려에게 나라를 받치면서 허무하게 끝이 나고 맙니다.

 

전기 통일신라, 중대 신라 시대

딱 잘라서 구분을 짓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구분 하자면 태종 무열왕 시기부터 통일 신라라고 하는 편입니다. 신라는 삼국 시대 때부터 골품제 안에서 성골 출신이 계속해서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던 중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이 즉위했던 것으로 보다시피 남자에게 원활한 세습이 되지 않았던 것이 중요한 배경이지 않았냐는 것이 역사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기는 통일 직후 이기 때문에 세 민족이 처음으로 융합된 시기입니다. 혼란스러울 수 있고 부흥 운동이 언제 나올지도 모르므로 각 지방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렇기 위해서 왕권 강화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태조 무열왕(김춘추)

진덕여왕을 끝으로 당나라와의 연합을 이끌었던 태종 무열왕(김춘추)이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이는 최초로 진골 출신이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습니다. 나당 연합군을 이끌었던 만큼 얼마나 힘이 강했을지는 짐작이 가능합니다. 

 

문무왕

무열왕에 이은 문무왕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나당연합군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와의 교전으로 내쫓으면서 삼국 통일을 완성합니다. 한 민족 최초로 삼국통일을 달성했으니 나라에 대한 애정이 넘쳐났나 봅니다. 그래서 죽어서 바다의 용왕이 되겠다고 말하며 바다에 묻히게 되고 이게 바로 문무대 왕릉입니다.

 

지방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상수리 제도를 실시합니다. 상수리 제도는 지방에서 힘 키우면 무서우니까 미리미리 각 귀족 자제들 중 한 명을 중앙 관직으로 불러오는 제도로 일종의 인질 같은 느낌으로 견제하는 제도였고, 외사정은 반대로 지방에 관리를 파견해서 감시하는 제도로 왕권 강화에 힘썼습니다.

 

신문왕

왕권 강화를 위해 많은 것들을 했지만 그래도 다른 진골 귀족들이 언제 왕권을 노릴지 불안하기 때문에 그냥 숙청 해 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김흠돌의 난을 명분 삼아서 찍어 눌러 버립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의 제가 회의 백제의 정사암 회의처럼 귀족회의인 화백회의가 있었는데, 그 회의의 장이었던 상대등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귀족 모임은 약하게 만들고 왕실을 보조하는 집사부의 장인 시중을 강화하면서 왕권에 힘을 실어 줍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골품제에서 품에 해당하는 6두품을 키우게 되고 대표적인 인물이 화황계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설총입니다.

 

귀족들의 힘을 빼기 위해 녹읍(수조 권과 역 포함)을 폐지 후 관료 전(수조 권만 포함)을 지급합니다. 아무래도 노동력까지 귀족들이 얻게 되면 힘 키우기가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넓어진 땅을 관리하기 위해서 9주 5 소경으로 행정구역을 정비하였습니다. 이때 9주는 고구려, 백제, 신라 영토에 3곳씩 배치했고 작은 경주를 의미하는 소경의 경우 경주가 우측 구석에 있다는 편향성을 극복하기 위해 정한 것입니다. 대표적인 곳으로는 중원경(충주), 서원경(청주)이 있습니다. 

 

 

 

 

군사 제도 역시 달라졌는데 중앙을 관리하는 9 서당과 지방을 지키는 10정으로 구분했습니다. 이때 9주에 하나씩인데 넓은 지역에만 1정을 더 해줘서 10정이 되었습니다. 문화에서도 왕권 강화를 위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바로 국학이라는 기관을 세워 유교를 가르친 것인대요. 쉽게 말해서 사상 교육을 시켜가지고 자발적으로 왕에 대한 복종심을 만들어 냈습니다. 

 

아버지를 기리려고 감은사를 만들었고 왕이 된 아버지가 머물 수 있도록 지하공간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만파식적은 아버지께 받은 피리로 왜적이 오면 스스로 소리를 낸다고 전해 지는 것으로 보아 왕권 강화에 힘쓴 아버지를 존경하고 그래서 이렇게 더 힘을 실은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후기 통일신라, 하대 신라 시대

후기에는 왕권이 약화되면서 그대로 힘을 잃어버린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말이 후삼국시대이지 그때도 힘은 없어서 빌빌 하다가 백제와 고려 중에 강한 곳에 먹힐 준비만 하고 있다가 그대로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느낌입니다.

 

왕권의 추락

신문왕 시절 김흠돌의 난으로 왕권을 강화했는데, 이번에는 김헌창의 난 때문에 왕권이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이를 계기로 진골귀족끼리 왕위 다툼이 시작되었고 점점 귀족들이 힘을 키우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귀족들은 본인들이 누렸던 특권을 되찾아 오게 됩니다. 먼저 관료 전 대신 다시 녹읍을 받음으로써 노동력을 확보하고 키워줬던 6두품의 힘을 다시 눌러 버립니다. 

 

이렇게 왕정은 귀족과 왕권이 힘겨루기 하다 보니 자연스레 지방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게 됩니다.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나라는 관리할 생각이 없으니 지방에서 이름 좀 날리던 사람들이 슬슬 답답하니 자기가 한다는 마인드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호족입니다.

 

1세대 호족

가장 먼저 이름을 알린 호족은 장보고입니다. 시험에는 안 나오지만 장보고의 일대기는 재밌습니다. 장보고는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활은 잘 쏘지만 골품에 해당되지 않아 출세는 막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기회를 찾아 푸른 바다를 넘어 당나라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쪽에서 활의 재능을 인정받아 이름을 날리게 됩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신라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보이길래 이 사람들을 관리하고 묶어줄 법화원을 세웠고 엄청난 부를 축척할 수 있었습니다.

 

힘을 키우고 나니 고국에서 성공하겠다는 꿈을 이루고 싶어 집니다.  현재 바닷가에 해적들이 많기 때문에 이를 소탕해 주겠다는 조건을 신라 왕에게 제시하였고, 이에 신라 왕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황실에 딸을 결혼시켜 출세를 꿈꾸다가 부하의 배신에 살해당합니다.

 

2세대 호족

장쏘공으로 호족들이 더 힘을 받았습니다. 견훤이 완산주에 후백제를 세웠고 궁예는 송악에 후 고구려를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견훤의 후백제가 완산주(전주)를 비롯하여 충청도, 전라도 곡창지대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훨씬 강력했습니다. 그리고 당나라에 오월 사신을 파견하여 옛 백제처럼 교류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문화

이렇게 황실은 개판, 호족은 날뛰니 백성들의 삶은 망했습니다. 관리가 안되니 개판이 된 것이죠. 화가 싸여 들고일어난 것이 원종 애노의 난입니다. 그리고 원래 교종을 믿다가 이 때는 선종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본디 교종은 글을 읽어 공부해서 부처가 되기 때문에 글을 아는 귀족들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개판이 되고 서로 권력 잡겠다고 난리를 치다 보니 명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선종이 유행했는데 선종은 글 필요 없고 참선만 있으면 누구나 부처, 왕이 될 수 있다는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고려의 건국과 의의

후백제의 힘이 강력했고, 후 고구려의 궁예는 송악(개성)에서 태봉(철원)으로 도읍을 이동하면서 미륵신앙에 심취하다 못해 점점 더 맛이 갔습니다. 폭정이 날로 심해져서 신하들이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왕으로 초대하여 고려를 건국했습니다. 후백제와 대치하면서 점점 밀려서 공산 전투에서는 왕건이 죽을 뻔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 안동의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를 압도하며 승리했고, 일리천 전투에서는 견훤이 합류하여 신검을 제압하면서 고려가 통일에 성공하게 됩니다.

 

중세시대의 의의

  • 중세 시대의 시작
  • 진정한 3국 통일
  • 골품 폐지

이 시기를 우리는 중세 시대라고 부르게 됩니다. 고대에서 중세가 되었다는 의미는 역사가 진보했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 고구려를 포함하여 이루어 낸 3국 통일이고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았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통일을 이루어 냈고, 호족 출신이 왕이 되었던 만큼 그간 골품 제도로 사람들이 자유롭게 뜻을 펼치지 못했던 세상에서 더 진보했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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