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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갈등 시작, 시진핑 주석이 된 이유

by ♾⚕⨊⪒૱ 2025.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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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 꼴지였다는 시진핑이 중국의 권력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시대가 만들어줬었는데, 그로인한 결과가 트럼프 vs 시진핑으로 세계는 대 혼란에 빠지고 있습니다. 중국은 국민 모두를 입맛대로 컨트롤이 가능하기 때문에 앞으로의 결과를 알기 위해서는 시진핑이 어떤 사람인지 탐구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1. 보시라이와 왕리쥔 사건
  2. 보시라이와 시진핑의 차이
  3. 2012년, 중국의 권력 분기점
  4. 중국 권력구조의 실제

 

 

 

보시라이와 왕리쥔 사건

2012년 2월, 중국 충칭시의 부시장 왕리쥔이 돌연 미국 청두 영사관으로 망명을 시도하며 벌어진 사건은 단순한 내부 갈등을 넘어서 중국 공산당의 권력투쟁을 전면에 드러낸 계기였습니다.

 

중국 2012년 권력투쟁 – 보시라이와 왕리쥔 사건, 시진핑의 부상 흐름도
보시라이와 시진핑

 

왕리쥔은 당시 충칭시 시장 보시라이의 최측근이자 공안국장이었습니다. 그가 망명을 시도한 이유는 보시라이의 부인 구카이라이가 영국 사업가 닐 헤이우드를 독살한 사건을 은폐하려던 보시라이와 갈등이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왕리쥔은 내부 수사 중 이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미국에 넘기려다 결국 실패하고 중국 당국에 넘겨졌습니다.

 

보시라이와 시진핑의 차이

보시라이와 시진핑은 모두 태자당 출신입니다. 보시라이는 혁명 원로 보이보의 아들, 시진핑은 시중쉰의 아들입니다. 어릴 적엔 같은 베이징 고위층 자제 모임에서 자랐지만, 인생 궤적은 완전히 갈렸습니다.

 

보시라이는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 활동을 주도했고, 반대로 시진핑은 아버지의 실각으로 시골에 하방되어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는 이후 두 사람의 정치 스타일을 갈라놓게 된 중요한 배경입니다. 심지어 보시라이는 본인의 아빠 보이보를 공개적으로 때리기도 했고, 보이보는 이후 역시 자신의 아들 답다며 자랑하기도 했죠. 시진핑은 아버지가 권력을 빨리 잃어버린 덕분에(?) 홍위병 활동을 조용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2012년, 중국의 권력 분기점

2012년 보시라이 사건은 시진핑이 실질적인 권력을 잡는 계기가 됩니다. 보시라이가 충칭시에서 마오쩌둥식 통치를 재현하며 신좌파의 상징으로 부상하자, 중국 공산당 내부에선 보시라이가 군부와 손잡고 쿠데타를 시도하려 했다는 의혹이 퍼졌습니다.

 

같은 해 미국에서 후진타오 측근 링지화의 아들 링구가 페라리를 몰다 사망한 사건이 터지면서 공산당 고위층의 부패가 폭로됩니다. 믿고있던 고위부가 어느정도 썩었는지 인민들이 모두 알게된 사건이었으니 말입니다. 개방을 하면서 외국 자본들이 물 밀려들듯이 쏟아져 들어왔고, 은닉 재산이 기본 몇 조 단위라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이에 당 내부는 개혁의 바람이 강하게 불어오면서 무엇인가 변화를 주지 않으면 정말 무슨 일이 들고 일어나 질것만 같아 졌습니다.  그래서 당에서는 그동안 조용하고, 권력욕 없어 보이던, 개파와 거리가 있는 시진핑에게 권력을 몰아주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일단은 우리쪽으로 민심을 돌려야 하고, 시진핑은 그간 조용조용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별 탈 없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시진핑은 조용하고 검소하게만 지내던 시절에서 갑작스럽게 권력을 잡게 되었고, 권력을 잡은 후에는 자신이 바꿔 보겠다며 정말 중국의 모든권력을 전부 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국 권력구조의 실제

중국은 당이 곧 국가입니다. 헌법상 당은 국가기관 위에 있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가 행사합니다. 상무위원은 7인으로 구성되며, 이들 중 총서기가 당 최고지도자가 됩니다.

 

시진핑은 2007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진입하고, 2012년 총서기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되며 권력을 집중하게 됩니다. 2018년 헌법 개정으로 국가주석 임기 제한도 철폐되며 사실상 종신 지도체제로 진입하게 됩니다.

 

결국, 보시라이가 없었다면 시진핑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몰락은 새로운 독재의 서막이었고, 동시에 공산당의 생존 전략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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